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거란 유민들의 고려 침공 (문단 편집) === 몽골의 개입과 [[강동성 전투]] === [include(틀:상세 내용, 문서명=강동성 전투)] 1218년 12월, 동진의 2만 군대와 몽골군 1만 군대가 국경을 넘어 고려로 진입해 거란군이 점령하고 있던 [[맹주]], [[순천|순주]], [[덕천|덕주]]를 함락시키고 강동성으로 향했다. 고려에 미리 허락을 구하지도 않은 채 3만이나 되는 외국군이 고려를 돕기 위해 들어온 것이다. 그들은 연유를 묻는 고려에게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거란병이 너희 나라에 도망해 있은 지가 3년이나 되었는데도 이들을 소멸하지 못한 때문에 [[칭기즈 칸|칸]]께서 군사를 보내어 이를 토벌하니, 너희 나라는 오직 군량을 도우라." 이에 조충이 개경에 어찌해야 할지를 묻자, 조정은 다음과 같은 명령을 내렸다. "대국이 군사를 일으켜 환난을 구제하려고 하니, 그들의 모든 지휘에 따라라." 이후 몽골 원수 [[카치운]](哈眞)[* 칭기즈 칸의 동생 카치운과 동명이인이다.]은 고려 조정에 형제의 맹약을 맺을 것을 요구했다. 이에 [[김취려]]가 주위의 만류를 뿌리치고 몽골군 진영으로 단독으로 찾아갔다. 카치운은 우선 [[칭기즈 칸]]과 [[동진국]]의 [[포선만노]]에게 절하라고 요구했다. 김취려는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답했다. "하늘에는 해가 둘이 없고 백성에게는 두 임금이 없는 법인데 천하에 어찌 두 황제가 있겠습니까?" 그러면서 김취려는 동진국의 포선만노에 대한 절은 거부하고 칭기즈 칸이 있는 방향으로만 절했다. 카치운은 그의 이 같은 언행과 [[관우|아름다고 긴 수염을 갖춘 용모]]에 감탄하며 나이를 물었다. 김취려가 자기보다 나이가 많다는 걸 알게 된 카치운은 아예 김취려를 형으로 삼고 자신은 동생이 되었다. 그로부터 수일 후 [[조충(고려)|조충]]이 찾아가자, 카치운은 조충에게도 나이를 물었다. 이에 김취려가 조충이 자기보다 위라고 대답하자, 카치운은 조충을 형으로 모셨다.[* 사실은 두 사람 다 나이를 10살 정도 부풀렸다. 실제 조충은 1171년생으로 당시 47살이었고 김취려는 1172년생으로 46살이었다. 아마도 기선 제압을 위해서 나이를 10살 정도 더 부풀린 것으로 보인다. 참고로 카치운은 1166년생이었다.] 이후 몽골-동진-고려 연합군은 합동으로 강동성을 공격했고, 가뜩이나 식량이 떨어져가는 데다 우두머리끼리 내분을 벌인[* [[승상]] [[야율걸노]]가 [[야율금산]]에게 죽었고 야율금산은 [[야율통고여]]에게 죽었고 야율통고여는 [[야율함사]]에게 죽었다.~~[[먹이사슬]]~~] 거란 유민들은 마침내 마지막 지도자 야율함사(耶律喊舍)가 자살하면서 1219년 2월에 항복했다. 카치운은 거란 포로 중 700명을 고려에게 줬고, 김취려와 조충에게도 15살 [[소녀]] 9명을 선물로 보냈다. 그리고 고려로 끌려간 거란족은 집단촌을 이루어 살게 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